서귀포의역사를담다

서귀포매일올레시장의 어원

서귀포는 고대 탐라국의 영토였고, 1946년에 남제주군이 되었다가 2006년에 서귀포시와 남제주군이 합쳐져서 현재의 서귀포시가 되었다.

서귀포의 지명에 관련되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 진나라의 방사였던 서불이 진시황의 명령을 받아 불로초를 찾아 헤매다가 제주도에 도착했다. 하지만 불로초를 찾지 못하고 돌아가는 도중 정방폭포의 아름다움에 취해 벽에 서불과차, 즉 서불이 지나갔다는 말을 써놓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서불이 돌아갔다는 의미인 ‘서귀’, 항구를 뜻하는 ‘포’ 자가 합쳐져서 서귀포(西歸浦)가 되었다는 것이다.

올레라는 말은 제주도 말로 큰길에서 집의 문 앞까지 이어지는 좁은 길을 가리키는데, 시장을 포함한 인근 지역이 제주올레 6코스에 포함되면서 서귀포매일올레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의 모습이 있기까지

서귀포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남단에 위치한 도시로, 한라산을 기점으로 하여 가로로 길쭉한 제주도의 아랫부분에 해당된다. 따라서 서귀포는 한쪽 면은 제주시와 맞닿아 있고, 다른 면은 바다와 면해 있다. 서귀포시의 해안선은 179km에 이른다.

제주도는 예부터 사람들이 정착해 살아왔지만 오랫동안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지역이다. 그래서 농업과 목축, 수산업 등 주로 자연을 이용한 경제 활동을 해 왔기에 상업 활동 또한 제한적이었다. 또한 제주도에는 오랫동안 도로와 교통수단이 잘 구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남쪽에 있는 서귀포는 더욱 상업 활동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구한말에 정기시장이 개설되기 전까지는 공식적인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서귀포시 지역에 시장이 생겨난 것은 1906년 당시 제주 군수였던 윤원구가 물산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지방 행정구역인 면이나 읍 등 중심이 되는 지역에 5일마다 장이 서는 정기시장을 개설한 이후였다. 즉,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아니라 당국의 요구에 의해 인위적으로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일제는 일제강점기에 접어들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14년 토지의 세부 측량을 실시했는데, 그 첫 번째 대상지가 제주도였다. 그 이유는 제주도에 국공유지가 많았던 탓이다. 다음해에 측량을 완료했는데, 당시 관리들이 토지를 대신 신고해 빼앗거나 국유지에 편입시키는 일이 많았다. 그 결과 국공유지를 비롯해 많은 땅이 일제의 관리 아래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과거 역둔토나 목장토를 경작하며 살던 빈농이나 화전민들은 농사지을 땅을 잃었고, 다른 생활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건너가 열악한 환경인 탄광이나 공장에서 노동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를 부추긴 것은 1923년 제주도와 일본 오사카를 오가는 직항로를 개설한 것이다. 재일교포 중 제주도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이런 일련의 과정 때문이다.

또한 1912년에 제주도의 수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도로를 건설했다. 이 도로의 확장이 끝난 것은 1918년이었다. 이 도로는 오늘날 제주도 일주도로라고 불리는, 해안을 따라 난 지방도 1132선이다. 새로운 교통망인 일주도로를 통해 해안가에서 생산된 해산물이 해안가 곳곳에 개발된 항구인 성산포, 서귀포, 모슬포 등을 통해 반출되었다.

이런 상황은 예부터 제주의 중심이던 성읍이나 홍로, 명월, 대정과 같은 마을이 쇠락하고, 바닷가에 있는 마을이 커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1906년에 시장이 개설되고 도로망이 갖춰져지는 가운데, 서귀포시 지역에 속한 시장들은 꾸준하게 장이 섰다. 시장들 또한 모두 해안가에 위치했다. 1930년대 후반의 자료를 보면 당시 서귀포시 지역에 개설된 시장 중 가장 활발한 장세를 보인 것은 모슬포장이었다.

그러나 장날과 도시 사이의 거리를 고려해서 생각해보면 서귀포 지역에 개설된 6개의 시장은 지리적으로 가운데에 있는 서귀장을 중심으로 둘로 나뉜다.

즉,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면서 모슬포장(1, 6일)부터 화순장(2, 7일), 중문장(3, 8일)을 거쳐 서귀장(4, 9일)으로 이르는 경로가 있고 다른 하나는 성산(1, 6일), 남원(3, 8일), 서귀장(4, 9일)에 이르는 경로이다. 성산과 남원의 경우는 다른 곳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장날이 하루 건너뛰었을 것이다.

훗날 서귀포시의 중심이 서귀장이 섰던 서귀포가 되고, 상권의 중심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거래 금액에서는 모슬포장이나 성산장에 비해 적었지만 지리적인 이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후반인 1930년대 말 오늘날의 서귀포시에 개설되었던 시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30년대 말 오늘날의 서귀포시에 개설된 정기시장

시장 이름
소재지
장날
연 거래액(원)
1930년대 말 오늘날의 서귀포시에 개설된 정기시장
모슬포장
제주읍 대정면 하모리
1, 6일
188,187원
화순장
제주읍 안덕면 화순리
2, 7일
18,850원
중문장
제주읍 중문면 중문리
3, 8일
2,120원
서귀장
제주읍 서귀면 서귀리
4, 9일
69,252원
남원장
제주읍 남원면 남원리
3, 8일
29,640원
성산장
제주읍 성산면 성산리
1, 6일
98,450원

자료: 《조선의 시장》 문정창, 1941년




참고문헌

  • 《朝鮮の市場(조선의 시장)》 조선총독부, 1924년
  • 《朝鮮の市場(조선의 시장)》 문정창, 1941년
  • 《사라져가는 우리의 오일장을 찾아서》 주영하 외, 민속원, 2003년
  • 《삶과 문화 52호》 제주문화예술재단, 2014년
  • 〈최영희교수의 한국사기행, 제주〉 경향신문, 1986년 9월 25일자
  • 서귀포시청: www.seogwipo.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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